
세상에 욕 말고 할 말이 뭐가 남았을까? 나는 그렇게 자문했다. 모든 걸 잃고 남은 건 분노와 절망, 그리고 욕뿐이었다.
118! 독같은 년, 내가 나 자신에게 붙인 별명이다. 죽어도 싼 년. 아니, 사실 죽어야 한다.
나 같은 미친년은 살아 있을 자격이 없다. 인생의 나락에 스스로 뛰어들었던 나는 그냥 또라이같은 불나방. 그 끝은 불구덩이였고, 벌레잡는 포충등에 뛰어든 나방이며, 전기 스파크에 한순간 지직대며 죽어가는 머저리 나방처럼, 남은 것은 잿더미뿐이다.
나는 다 잃었다. 거지가 됐다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남자, 사랑 때문이다. 나 자신을 믿었어야 했는데, 남자를 믿은 내 잘못이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남자의 사랑만큼 가볍고 덧없는 게 어디 있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저급 할리퀸 소설 심지어 현대판 장르 로맨스 판타지에서도 남자의 사랑은 깃털터럼 가볍고 수소보다 질량이 작다.
그걸 잘 아는데도, 25년간 학습이 되었는데도, 썩은 동태눈깔을 달은 것인지, 빌어먹을 콩깍지에 나는 나의 운명을 걸었다.
사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그 남자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사기꾼이다’며 직감을 했고 거절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나는 조금씩 그의 완벽한 모습에 무너졌다. 아름답게 느껴졌던 그 순간들이 끝없는 절망의 시작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런 말을 하면 믿기 힘들겠지만, 그는 우아하고 지적이며, 외모까지 훌륭했다. 어느 집 귀족 자제라도 되는듯 말투나 태도까지 흠잡을 데 없었다.
마치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왕자님 같은 그의 눈빛에는 진정성이 담겨 있었다. 마음까지 따뜻했던 그는 정말 완벽했었다. 하나, 그 뒤에 감춰진 사기와 배신을 나는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딱 3개월짜리 불같은 사랑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완벽하고 달콤한 시간이었지만, 그 대가로 나는 내 전부를 잃었다.
극악의 고난을 겪게되면 사람들은 변한다. 나도 그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변했다. 우아하고 성숙하며 배려심 많은 여자는 온데간데 사라졌고, 입만 열면 욕이 튀어나오는 인생 패배자의 모습을 한 푸념쟁이로 변해버렸다.
“야, 이 개@끼야. 너 잘났다! @팔놈아!”
이렇게 욕이라도 질펀하게 해야 내가 숨을 쉴 수 있었다. 그 남자는 여전히 어딘에선가 아주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 사실에 처절하게 흐느껴 운다.
복수라고는 저주밖에 할 수 없는 나. 힘없고 이름 없는 비천한 무명의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저주를 퍼붓는 것뿐이었다.
인생은 운명의 굴레, 카르마의 저주, 반드시 심판받으리. 삼류 사이비 종교같은 신념으로 너도 언젠가는 나처럼 당할 거야, 너처럼 비열한 여자에게. 너 같은 여자한테 당하는 게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비참한지 알 게 될 거야. 라며 마음으로 빌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내가 우울하고 불행하다는 걸 전혀 모른다. 겉으로는 늘 웃고 떠드는 나를 보며, 사람들은 내가 예전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내 속을 모른다. 나는 그저 가슴 속 분노와 슬픔을 혼자 삼키며 복수의 심정으로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분노의 화신처럼 증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인생의 성공을 기원하며 그놈을 만났지만, 몰락한 나는 고향인 논산으로 내려와 택배 상하차 일을 시작했다. 일을 하는 동안은 모든 걸 잊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도무지 이 택배 상하차 시스템은 잡념을 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쌓여가는 택배 물건들,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감독관들 틈에서 한량처럼 유유자적 할 수는 없는 상황, 또 무거운 상자를 들어 올리는 순간에는 오히려 내게는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나는 그때마다 그 남자를 떠올렸다. 이 무거운 택배 상자를 그놈의 면상에 후려갈기는 상상을 하면 조금은 통쾌했다.
그러나 그런 건 잠시 뿐. 집에 돌아오면 다시 현실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 현실을 견디기 위해 허공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내 속에 쌓인 악이 풀려나가는 기분이었다.
노동으로 지친 몸은 침대에 가라앉는다. 이때도 내가 현실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여지없이 흐느껴 운다.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하는 걸까?’
그렇게 1년이 지난 후 내가 쓴 시나리오와 비슷한 설정의 드라마와 영화가 물밀듯이 쏟아졌다. 전문용어로 파쿠리였다. 여기저기서 내 설정을 조금씩 표절한 것들이었다. 이건 분명 그놈 짓이다. 이걸 증명할 수 있는 길은 내가 버려진 시점에 내 설정집을 그놈에게 넘겼다는 사실이다.
설정집을 받은 그놈은 돌연히 사라져버렸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또 흘러도 절대 돌아오지 않는 것을 깨달은 나는 배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믿었던 탓일까? 아픔과 공허함으로 나는 폐인이 되었다. 내 설정집을 표절한 작품이 쏟아지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발광해도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딱히 내 설정이라 증명할 길도 없었고, 또 이름 없는 비천한 무명 시나리오 작가의 말을 들어 줄 이도 없었다.
이때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이 무엇인지 명확히 깨달았다. 주먹을 가슴을 내리쳐도 속으로 아픈 것보다 아프지 않았다. 세상은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들어준다면 도구로서 쓰일때 뿐이다.
어차피 인간은 잘해야 100년짜리 삶이다.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모두 죽으니, 죽고 나서 보자. 뭐, 이렇게 위안을 삼는 것으로 내 억울함을 달래본다.
1년을 그렇게 보낸 후 또 1년을 불안증세와 우울증으로 보냈다. 2년의 끝자락, 어느날 엄마에게 다급한 전화가 왔다.
“왜?”
“야, 나 오늘 땡중이 찾아왔는데, 너보고 그냥 그냥 두면 죽는다더라? 한맺힌 원혼이 잠식했다며 빨리 풀어야 된다고 하던데, 완전 미친 또라이 아니니?”
“그 스님 어디 살아?”
“그건 왜?”
“그냥 말해. 나 심각하니까.”
스님의 거처를 알아낸 나는 부리나케 그곳으로 향했다. 내가 매일 하느님께 죽여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걸 스님이 어떻게 알았을까? 베겟잎을 다 적셔야 만 잠을 잘 수 있는 내가,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다는 걸 그 스님이 어떻게 알았을까? 머릿속은 온통 궁금함으로 가득찼다.
드디어 수소문해 간 스님의 집, 이건 뭐… 초라한 행색에 딱 봐도 사짜 냄새가 풀풀나는 곳이었다. 들어갈까 말까 몇 번을 망설인 끝에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어, 왔어?”
이건, 뭐.. 처음보자마자 아는 체를 하다니..
“나, 알아요?”
“아, 그럼 알지.”
“어떻게요? 엄마가 말했어요.”
“그렇다고 해두지. 아무튼 죽을 생각하지 마. 안 죽어.”
“네?”
“자네. 죽으려고 차에 뛰어들어도 차가 찌그러지고, 물에 빠져도 누군가 와서 구하니까 죽을 생각하지 하지 말라고, 괜히 죽는다고 지랄했다, 반 병신 돼서 엄한 가족 힘들게 하지 말고 그냥 참아. 그 미친놈은 나중에 벌 받을 거니까..”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한걸 왜 이 스님이 알고 있지?
“미.. 미친놈한테 당한 거 어떻게 아셨어요?”
“미친놈이 아니라 정확히는 색/”
“잠깜만요. 내가 당한 거 어떻게 아셨나고요? 진짜 뭘 알고 있나요?”
“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앉아서도 구만리를 보는 사람이야. 자네의 미래도 알고 있어.”
“미.. 미래요? 제 미래는 끝난 게 아닌가요?”
“하이고, 이 답답한 사람아.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다네. 또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이고.”
“그건 세상 사람들이 다 하는 말이잖아요.”
“그렇지. 다만 물이 언제 끓어오르는지 몰라서 힘든 거야. 언제가는 물이 끓는 건 기정사실이다.”
“그게 만약 50년 뒤라면요?”
“으이그, 진짜. 딱 3년만 참아. 그냥 여행 왔다고 생각하고, 즐겨.”
“정말 3년이면 내 인생이 달라지는 건가요?”
“지금 터널에 갇혀 있어서 그래. 바로 시간의 공백이라는 거야.”
“네? 시간의 공백이요?”
“그래. 그런데 그것을 좀 더 빨리 없앨 수 있어. 딱 2백만 원짜리 굿을 해. 그럼, 앞 길이 훤히 트일 거야.”
이런, 씨. 이거 완전 사짜 아냐? 역시나 돈을 요구하는 걸 보니, 사기꾼이었다. 사기꾼으로 시작한 내 막장 인생에 계속 사기꾼만 꼬이는 구나.
“됐거든요? 얼어죽을… 2백만 원이 뉘 집 개이름인 줄 아세요?”
나는 땡중에게 톡 쏘아붙이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하지만 집에 오는 내내 터널에 갇혔다는 말과, 시간의 공백이라는 말이 떠나지를 않았다. 시간의 공백이라니…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 말은 그 후로 3년 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꼬리표처럼 낙인처럼 매일 내 입안에 또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쩌면 그 말의 희망을 믿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확히 3년이 흐른 지금 내게 아무 일도 없었다. 역시나 또 속은 것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무 일도 없었다.
- 참조: ‘영혼의 온기’라는 단어는 권선옥 시인님이 어느 행사에서 한 말을 차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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