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온 도라이: 천상의 아미
(이서민 ver.)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처음 오랑이 갑자기 나타났을 때, 그건 명백한 위기였다.
그는 4살짜리 아이 몸을 가진 성가신 존재였다. 근근이 살던 내 인생에 느닷없이 끼어든 불청객.
하지만 이 위기가 내게 천금 같은 기회가 되었다.
사이비 스님이 말했던 3년의 터널.
그 지독한 고난의 시간 끝에, 드디어 희미하게나마 출구가 보인다. 저주받은 내 인생도 이제는 밝은 미래로 향할 예정이다.
그 희망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기분 좋게 밖으로 나가 오랑의 입을 옷을 산 뒤 집에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그의 앞에 쇼핑 봉지를 툭 던졌다.
“자, 입어.”
“이게 뭐죠?”
“잔말 말고 입으라니까.”
봉지 속 옷을 확인한 오랑은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아 기쁜 모양이었다. 눈물이 그렁한 게, 어이없게도 감동하고 있다.
“고만 감동하고 빨리 입어라.”
내 성화에 그는 옷을 품에 안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꼴에 볼 것 못 볼 것 다 보여준 놈이 괜히 내외하는 척이었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온 오랑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성인 모습의 오랑이 제 옷을 입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첫날은 이불로 몸을 감쌌고, 둘째 날은 내 원피스를 입었으니.
티셔츠와 청바지, 그저 평범한 조합일 뿐인데도, 오랑의 넓은 어깨와 긴 다리 덕분에 옷이 화보처럼 보였다.
단지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일 뿐인데도 말이다.
완벽했다. 너무 잘 어울려서 괜히 짜증날 정도였다.
그런데 겉모습에 속아선 안 된다. 이놈은 알고 보면 순수한 변태니까.
그는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확인하며 혼자 감탄하기 바빴다. ‘왕자병’이라는 단어가 인간화되면 딱 저 얼굴일 것이다.
그러더니 나를 돌아보며 폼을 잡았다. 마치 ‘이 잘생김, 감탄 좀 해보라’는 표정이었다.
“이 옷이 제 몸에 이렇게 딱 맞을 줄이야! 설마, 몰래 제 신체 치수를 잰 건 아니겠죠?”
“아니, 네 키가 190 정도 되길래 대충 골랐어. 덕분에 외국인 중고 옷 가게까지 갔다 왔다, 네놈 때문에.”
내 노고를 생색내자, 오랑의 눈이 감격에 반짝였다.
순진한 놈.
내가 이유 없이 옷을 사줄 리 없잖아. 네놈 덕분에 4만 원이나 썼다고. 내 피 같은 돈을.
거금 4만 원을 들인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제대로 된 옷이라도 있어야 너를 데리고 밖에 나갈 수 있으니까.
“너, 다시는 아이로 돌아가지 않는 거지?”
“아니요.”
“아까는 어른으로만 산다며. 거짓말이었어?”
“아, 그건 화가 나서 한 말이고요.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만 어른으로 있을 겁니다.”
훗. 천상계 사람들은 거짓말 못 한다더니, 정말 웃긴다. 거짓말이라면 날고 기는구만.
이로써 저 놈은 믿을 놈이 아니라는 게 증명됐다. 천상계 놈들 특유의 말뿐인 정의와 사명뿐이다. 천상계인 너도 거짓말이나 하는 주제에.. 나는 절대 너를 믿지 않는다.
뭐, 어쨌든.
오랑이 시도 때도 없이 발가벗고 다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가 알몸이 되는 시간은 해 뜰 때와 해 질 때뿐이니까.
다만, 해 질 때가 문제다. 그 전에 무조건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뜻이다.
“가자.”
“어딜요? 저는 지금 연오개를 찾으러 가야 합니다.”
“연오개? 그게 뭔데?”
내 물음에 오랑은 잠시 머뭇거렸다. 뭔가 말하기 곤란한 일인 듯하다.
“뭔데, 연오개가?”
“공주님이 찾아야 할 사람입니다.”
“왜?”
“공주님이랑 저처럼 같이 지내야 할 사람이니까요.”
저 놈, 포기를 모르는구나.
분명히 나는 각성 같은 거 안 한다고 말했다.
“닥쳐. 나 안 한다고 했지? 어차피 3년 있다가 돌아갈 거면 조용히 시키는 대로 있다가 가.”
“하지만, 공주님—”
“닥쳐. 빌어먹을 천상계 놈들아. 너희들이 내 밥 먹는 데 보탠 거 있어?”
내가 화를 내자, 오랑은 말문을 닫았다.
아마 아침에 쫓겨난 일이 두려운 모양이다.
“집에서 재워주는 대신 네가 할 일이 있어.”
“뭔데요? 시키는 대로 할게요.”
그의 대답에서 각성을 포기했다는 기운이 느껴졌다.
다행이다.
진드기 하나도 힘든데, 또 다른 진드기를 들이라고?
천만에. 나는 절대 천상계 놈들 뜻대로 살지 않는다.
빌어먹을 천상계.
변태 진드기를 보내줬으면 잘 써먹고 돌려보내는 게 최선이다.
나는 오랑을 데리고 내 예전 일터로 향했다. 하우스 작업장.
“하우스”라는 이름만 들으면 도박판 같은 걸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는 엄연히 건전한 일터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컨테이너 사무실이 보였다. 문 너머로 익숙한 얼굴, 김 사장님이 앉아 계셨다.
“김 사장님!”
“어, 서민아. 오랜만이다. 글 쓰는 건 잘 돼가냐?”
“연봉 10만 원 정도요.”
김 사장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의 초라한 연봉 탓일 것이다.
‘겨우 그 정도 벌 거면 차라리 여기서 일하는 게 낫지 않나?’ 뭐 그런 생각이셨겠지.
“이 친구가 그 친구야?”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너무 잘생겼네. 멀쩡한데 왜 여기 온 거야?”
“불법 체류자거든요.”
“아하! 그럼 딱 맞는 곳으로 왔네.”
사장님은 오랑을 보며 반겼다.
반면, 오랑은 자신이 무슨 일을 맡게 될지 몰라 잔뜩 궁금한 얼굴이었다.
짧은 소개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작업장으로 들어섰다.
아, 그리웠던 내 일터.
다시 여기서 일하라면 못하겠지만, 이곳은 나에게 소중한 추억이 많은 곳이다.
작업장은 쨈용 딸기 꼭지를 따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비수기라 딸기가 없다. 딸기는 추운 계절에 나와 더운 계절에 사라진다.
딸기철이 아니면 김 사장님은 작업장을 그냥 두지 않았다.
지금은 고구마 껍질 까는 곳으로 활용 중이었다.
작업장 한쪽에는 김장할 때 쓰는 대용량 고무 다라이가 줄지어 있었다. 그 안엔 물기 어린 고구마가 가득 담겨 있었고, 날카로운 칼질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생 고구마 특유의 단내가 코끝을 스쳤다
칼질 소리만 가득한 가운데, 아무도 내가 오랑과 함께 들어온 걸 눈치채지 못했다.
“여사님들!”
사장님이 목소리를 높이자 할머니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아이고, 서민이 아니여?”
“우리 작가님 오셨네.”
“새신랑 데리고 왔는감?”
여기저기서 반가운 인사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새신랑’이라는 말에 얼굴이 굳었다.
이걸 어쩌나. 여기까지 생각은 못 했네.
그때, 오랑이 갑자기 소리를 쳤다.
“네! 저는 서민 님의 부군입니다!”
이놈이 나를 엄마로 만들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내로 만드네.
분명 자기 이득을 위해서다.
사회적 관계에서의 역할을 너무 잘 아는 놈이다.
그러나 지금 오랑은 모르고 있다.
내가 왜 너를 여기 데리고 왔는지.
여사님들에게 너를 소개하려고 온 게 아니다.
“아니에요! 신랑 아니고 그냥 남자 친구예요. 회사에서 잘려서 잠깐 알바하러 온 거예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오랑을 끌어다가 고무 다라이 뒤쪽에 앉혔다.
김 사장님이 비닐 앞치마, 팔토시, 그리고 장화를 가져다주었다.
“입어. 작업복이야.”
오랑이 원망 어린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표정이 마치 아이가 혼난 뒤 억울해하는 모습 같았다. 그 모습에 웃음이 나오는 걸 어쩌겠는가
“사장님, 저 친구는 몽골에서 왔어요. 그래서 키가 크고 머리도 긴 거예요. 한국말 잘 못하니까 그냥 손으로 대충 얘기하시면 돼요.”
“아, 그래? 인물이 아깝네.”
“얼굴 보고 사귀는 거예요.”
내 말을 듣고 사장님과 여사님들이 깔깔 웃어댔다.
그 사이, 작업복을 입은 오랑은 할머니들에게 일을 배우고 있었다.
할머니들은 손짓으로 고구마 껍질 까는 법을 가르쳐 주며 친절히 다가섰다.
그 와중에도 오랑은 힐끔힐끔 나를 쳐다봤다.
그 눈엔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다.
“오랑, 할머니들 말씀 잘 듣고 열심히 일해. 해 지기 전에 집에 들어와야 해. 집 오는 길 기억하지?”
내 말에 오랑은 구슬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을 들고 도마 위에 고구마를 올려 양끝을 치기 시작했다.
일하는 모습이 생각보다 능숙해서 사장님이 감탄했다.
“아이고, 잘하네.”
“그럼요. 징기스칸의 나라에서 왔어요. 고구마 하나로 세계 정복도 할 기세죠.”
내 말에 또 모두 웃음을 터뜨렸지만, 오랑의 얼굴엔 그늘이 졌다.
그가 그러든 말든, 이제부터 내 팔자는 피었다.
이제 진짜 ‘남자 잘 만나 팔자 고친다’는 게 뭔지 알겠다.
고구마 한 박스에 2000원. 오랑이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면 한 달에 135만 원쯤은 벌 수 있었다.
내가 혼자 벌 때보다 많이 버는 돈.
물론 더 좋은 일자리를 알아볼 수도 있었지만, 주민번호가 없는 오랑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신분이 없으면 공장에서조차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즉, 그는 인간계에서 불법체류자나 다름없다. 이런 일을 하는 수밖에…
또 그가 집에서 빈둥거리는 꼴은 못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쁜 건, 이제 내가 먹고살려고 일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나는 집에서 글에만 집중할 수 있다.
오랑, 넌 하늘이 준 기회야.
3년 동안 잘 부탁할게. 나의 좌청룡 오랑아.
그런데, 천상계가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 어째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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