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온도랑이, 천상의 아미

흙투성이 고구마를 물이 담긴 다라이에 쏟아부었습니다.
“철퍽!” 고구마가 물속으로 빠지며 흙탕물이 내 얼굴과 몸에 사정없이 튀었죠.
이래서 앞치마를 준 거였군요.
이 놈의 고구마는 왜 이렇게 큰 건지. 팔뚝만 한 걸 들고 깎으려니 내 팔뚝도 저릿저릿해집니다.
고구마 한 박스 껍질을 다 깎는 데 꼬박 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받는 돈이 고작 2,000원이라니, 이건 큰일이에요.
“야, 오랑.”
공주님이 내 옆에 다가와 콕 찌르듯 말을 던졌습니다.
“여기 할머니들은 한 시간에 두 박스 반은 깐다. 그럼 한 시간에 5,000원 버는 거야.
지금 8시니까 오후 5시까지 9시간 일하면 45,000원 받아서 집으로 와. 해지기 전에.”
이렇게 말하고는 냉큼 혼자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녀의 기대를 맞추기는커녕 지금 나는 고구마 몇 개도 못 깎고 있는 실정이죠.
“삭사사사삭, 삭삭.”
주변에서 감자칼이 휘몰아치듯 소리를 냈습니다.
그 속에서 내 서걱서걱하는 감자칼질 소리는 처참할 정도로 느리게 울렸죠.
내 옆자리 할머니들은 손이 얼마나 빠른지 고구마 껍질이 쉴 새 없이 날아다녔습니다.
그들의 다라이엔 벌써 하얀 고구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어요.
반면 내 다라이에는 겨우 몇 개뿐이었습니다.
순간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할머니들한테 지는 것 같은 기분이라니, 정말 창피했죠.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천상계 탑급 무사,
옥황상제의 호위무사였던 칠성 신군 오랑 대위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목욕 의자에 앉아 고구마 껍질을 깎고 있다니…
이세계로 떨어진 것도 극악의 미션인데, 지금까지 공주님의 신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세운 모든 전략은 죄다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다 옥황상제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첫 번째 요구를 들어줬다면, 그러니까 내가 원할 때 언제 어디서든 신의 능력을 쓸 수만 있게 해줬다면 지금쯤 이렇게 고구마나 깎고 있지는 않았겠죠.
나는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공주님과 데이트를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녀의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신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내 마음을 그렇게 폄하하다니요.
오늘따라 옥황상제가 유난히 얄밉습니다.
하아… 하루 종일 아이로 지냈던 때가 그립습니다.
밥 먹고 뒹굴기만 해도 뭐라 하는 사람 없었으니까요.
물론 눈치는 좀 보였지만 지금보다 나았죠.
그런데 내가 왜 그 말을 했을까요?
공주님에게 “하루 반나절은 어른으로 지낼 수 있다”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녀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날 돈 버는 기계로 만들어 버렸으니까요.
나는 단지 그녀와 데이트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녀의 마음의 병을 치유하려고, 신성을 채우려고 그랬던 것인데요.
그녀가 내 진심을 알까요?
3년 동안 딱 세 번 보낼 수 있는 발신 기회 중 두 번을 그녀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써버렸다는 것을요.
사실 오늘 나는 공주님과 카페에 가려고 했었습니다.
그녀가 남자친구가 생기면 해보고 싶은 리스트 중 하나였거든요.
솔직히 그녀가 아침에 옷을 사 들고 왔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드디어 내 뜻대로 되는구나!’ 싶었죠.
그런데 그 옷은…
여기 하우스에서 고구마 껍질 깎는 알바를 시키기 위한 계략이었습니다.
그렇죠.
전기세 좀 아껴라, 물 좀 틀지 마라 잔소리만 해대던 짠순이 공주님이 어쩐지 옷을 사오더라니, 역시나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순간 울화가 치밀어 손에 들고 있던 고구마를 다라이에다 확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참았습니다.
신이라면 자신의 마음을 억제할 줄 알아야 하니까요.
내가 이 하우스를 뛰쳐나가면, 이세계 생활은 끝입니다.
천상계에 귀속된 몸이고, 군인 신분인데다 미션 수행 중인 지금, 이건 탈영과 같습니다.
지금의 회한과 후회, 그리고 깊은 어둠 속에 빠진 내 자아가 내 신성을 점점 더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멍하니 칼질을 멈추고 있는데, 사장님이 다가와 말을 건넸습니다.
“오랑. 힘들면 쉬었다 해.”
나는 공주님이 설정해 둔 대로, 말 못 하는 불법 체류자 몽골 사람인 척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불체자는 이런 일밖에 못 해.”
사장님은 들통을 손에 쥔 채 혀를 찼습니다.
“나름 한국에 돈 벌러 온 것 같은데, 여기서 버는 것보다 더 벌고 싶으면 더 힘든 일을 하거나, 아니면 여자를 꼬셔 결혼해야지. 진실한 사랑 아니면 너 같은 불체자랑 결혼해 줄 여자가 있을까? 서민이가 착하니까 너랑 사귀는 거야. 잘해.”
가재는 게 편이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여기 사람들은 전부 공주님 편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짝이라는 식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꽤나 따갑게 느껴졌죠.
“이게 아닌데…”
나는 천상계의 신인데, 이런 취급을 받다니요.
그러나 당장 고민할 시간도 없습니다.
내 고구마 껍질 벗기는 속도가 너무 느려 공주님이 기다릴 4만 5천 원은 아직 멀었습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미션 클리어를 위해, 그리고 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해야죠.
점심시간이 되자, 사장님이 커다란 들통을 들고 비닐하우스 안쪽으로 소리쳤습니다.
“자! 여사님들! 다들 점심 먹고 해요!”
“요시.”
점심시간이다.
배가 고팠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생각해 보니 아침도 굶은 상태였더군요.
‘이런 험한 일을 시킬 거라면 아침밥이라도 챙겨주지.’
공주님이 또 한 번 원망스러워졌습니다.
서둘러 작업장 한편에 마련된 간이 식사터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엔 제대로 된 식탁과 의자 같은 건 없었습니다.
고구마 박스를 뒤집어 두 줄로 붙인 게 식탁이었죠.

식탁 위엔 냉면 그릇들이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릇 안에는 이상한 죽 같은 게 담겨 있더군요.
“…뭐야 이건.”
보자마자 식욕이 뚝 떨어졌습니다.
시뻘건 국물에 콩나물, 김치, 그리고 조금의 밥이 둥둥 떠다니는 그 음식.
솔직히 말해 개밥 같았습니다.
나 혼자 덩그러니 앉아 식탁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래서 아무도 나랑 밥을 안 먹으려 하는 건가’ 싶기도 했죠.
그때 사장님이 다시 소리쳤습니다.
“아이고! 여사님들! 밥 먹으라고요! 밥 먹는 시간 10분이면 되는데, 그 시간도 아껴서 얼마나 더 까겠다고 그래요! 밥 안 먹으면 고구마 한 박스 덜 줄 거니까 얼른 식사하세요!”
사장님의 성화에, 마침내 할머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속도가 엄청났습니다.
마치 전투 태세에 돌입한 듯, 쏜살같이 식탁으로 몰려들더군요.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습니다.
‘도대체 뭐 하는 분들이지?’
알고 보니, 할머니들은 10분 동안 벌 수 있는 850원을 아끼려고
배고픔을 참으며 계속 고구마 껍질을 깎고 있었던 겁니다.
“말도 안 돼…”
내가 상상하던 인간계와는 너무나도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나이 든 여자들은 정말 알 수 없는 종족 같군요.
나는 다시 내 앞에 놓인 냉면 그릇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시뻘건 국물에 콩나물, 김치, 그리고 밥.”
내 이세계 가이드북에도 없는 음식입니다.
옆자리 할머니에게 어눌하게 물었습니다.
“이거 뭐야?”
할머니는 나를 슬쩍 보며 웃었습니다.
“이거, 김치죽. 먹어 봐, 서민이 남자친구. 맛있어. 여기 사장님이 음식 솜씨가 좋아.”
‘맛있다니… 설마요.’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냉면 그릇을 들여다봤습니다.
이 모든 건 천상의 벌일지도 모릅니다.
어린 공주가 나락의 봉인 열쇠 천구를 깨뜨렸을 때, 그 곁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내 죗값일지도요.
하지만 이 정도로 끔찍한 형벌일 줄이야.
인간 세계의 삶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나는 숟가락을 들어, 사형수처럼 김치죽을 떠 입에 넣었습니다.
생각보다 먹을만하네요.
그런데 나는 천천히 맛을 보며 죽을 먹고 있는 반면, 할머니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죽을 먹어치우더니
곧바로 고구마 껍질을 벗기러 돌아갔습니다.
결국 나 혼자 덩그러니 식탁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모습에 비참함과 속상함이 밀려와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어찌어찌 일을 마치고, 사장님이 건넨 노란 봉투를 열었습니다.
안에는 1만 8천 원.
‘이걸로 집에 갈 수 있을까?’
공주님이 날 어떻게 다룰지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혼날 게 뻔했으니까요.
쾅쾅쾅!
“문 좀 열어주세요, 공주님.”
삐리릭.
도어락 잠금 해제음이 들리자 나는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예상대로 공주님은 문 앞에서 한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돈을 달라는 뜻.
오늘 하루 고생해서 번 내 일당을 말입니다.
봉투를 내밀기 전에 몸부터 문 안으로 들이밀었습니다.
혹시나 봉투 속 돈을 확인한 공주님이 화를 내며 날 쫓아낼까 봐 겁이 났거든요.
나는 자연스럽게 주방과 연결된 현관으로 빠르게 들어가며 봉투를 건넸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들려오는 공주님의 앙칼진 목소리.
“뭐야? 이거. 장난해?”
뒤돌아보기 두려웠지만 어차피 겪어야 할 일.
숨을 깊게 들이쉬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죄송해요, 공주님. 한 시간에 한 박스밖에 못 깎겠더라고요. 진짜 너무 고되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저, 그런 건 처음 해봤어요. 차라리 전투를 하라고 하면 하겠습니다. 그게 훨씬 쉽습니다!”
한 맺힌 하소연이 터져 나왔습니다.
내 말에 공주님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다행히 화를 내진 않았습니다.
“빨리 씻어. 물 틀어놓고 오래 씻지 말고, 밥 먹어. 그리고 내일은 더 분발하길.”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다시 거실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곧장 욕실로 직진했습니다.
문을 닫고 화장실 문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대로는 못 산다.’
매일같이 고구마 껍질을 벗기며 돈 버는 기계처럼 살 수는 없다!

그때였습니다.
파사사사사사.
해가 지기 시작하자 내 몸이 다시 아이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손이 작아지고, 몸이 줄어들면서 점점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갔죠.
그 순간,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신의 능력, 10%.
바로 그거다.
내가 이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천상계에서 내려올 때,
옥황상제는 내 능력 대부분을 봉인했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내가 아이의 모습일 때만 사용할 수 있는 능력 10%를 남겨두었죠.
나는 그것을 남을 돕거나 공주님을 위해 쓰는 대신, 이제부터 나 자신을 위해 사용할 겁니다.
“흐흐흐.”
나는 욕실 거울 속 아이가 된 내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드디어, 내게도 희망이 생긴 것 같습니다.
내일부턴 고구마 깎는 기계가 아닌, 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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