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온 도라이: 천상의 아미

“제 인생은 끝났습니다. 이게 다 공주님 때문이에요.”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거짓말이 들통난 것뿐인데, 그걸로 인생이 끝났다고 하는 건 무슨 소리인가? 이건 그냥 불쌍한 척해서 빠져나가려는 술수 아닐까?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렇게 단정 짓기에는 오랑의 표정이 너무 절박했다. 전화기 연극을 할 때의 메소드 연기와는 달랐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여느 아이처럼 훔치지도 않고 그대로 흘러내리게 놔두고 있었다. 어른의 정신이라 그런 걸까?
눈물 자국이 뺨에 두 줄로 번져 있었다. 전등빛에 그 눈물이 반짝이는 걸 보니 묘하게 아름답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짓고 있는 허망한 표정은 모든 걸 잃은 사람의 모습 같았다.
힘없이 바닥을 바라보는 깊은 눈은 세상의 모진 풍파를 다 겪은 사람처럼 보였다. 이건 연기가 아니었다.
“대체 왜 나 때문에 네 인생이 끝났다고 하는 거지?”
괜히 물어봤나 싶을 정도로 오랑의 눈빛은 변하기 시작했다. 분노와 공포 그리고 원망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그가 표독스럽게 답했다.
“3년입니다.”
“뭐?”
“3년 안에 공주님이 죄를 다 씻지 못하면, 제 인생도 끝입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막장처럼 흘러왔는지 이유가 명확해졌다. 전생에 큰 죄를 지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래, 그랬구나. 어쩐지 내 인생에 좋은 일이 하나도 없더라니.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뭔데?”
“말하기 싫습니다. 이해하지도 못할 거고, 이해할 수도 없을 겁니다. 공주님이 직접 깨달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럼 3년은 뭐야? 내가 3년 동안 죄를 씻지 못하면, 네 인생이 왜 망가지는 건데?
오랑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아니, 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순간, 4살짜리 아이가 아니라 30대 어른 남자가 내 앞에 있는 듯한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절대 아이가 풍길 수 없는 분위기였다.
“전 신입니다. 하지만 인간계로 내려오면서 반은 인간이 되었죠.”
“그래서? 그게 뭐가 문제인데?”
“제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공주님이 죄를 다 씻지 못하면, 3년 후 저는 천상으로 올라갑니다. 하지만 제 형상은 지금의 4살 아이로 고정됩니다.”
“천상에서 자라면 되잖아. 나쁘지 않지 않아? 새로 시작하는 기분일 텐데.”
오랑의 얼굴은 더욱더 일그러졌다. 내 말이 그의 염장을 지른 것으로 추정된다. 그게 맞다는 듯 오랑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천상에서는 성장이 없습니다! 영원히 4살 아이로 살라는 건데, 제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나의 여자친구 연화는요? 그녀는 어쩌라고요!”
세상에, 남자는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똑같구나. 나 같으면 아이로 사는 게 더 행복할 것 같은데. 남자라고 여자친구는 포기 못하는 건가 보다.
하지만 그의 절망은 진심처럼 보였다. 더 이상 툴툴거리는 걸 듣고 싶지 않아 넌지시 말했다.
“그럼 원래 네 모습으로 돌아가. 아까 어른으로 변했었잖아.”
괜히 말했나 싶었다. 오랑의 얼굴이 더 험악해졌기 때문이다.
“너프라는 걸 모르세요? 능력을 제한하려고 일부러 저를 아이로 만든 겁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공주님 때문이에요. 힘을 줄이려고 하니까 나이를 줄이는 방법을 선택한 거라고요. 왜 이런 줄 아세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난 그냥 사람 이서민일 뿐인데.”
“공주님의 아버님이신 옥황상제님의 결정이었습니다. 성인 남자를 보내면 문제가 생길 거라 생각해서 저를 아이로 만든 거예요. 이런 줄 알았으면 절대 이 임무를 수락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도 피해자라고요!”
내 전생의 아버지께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좌청룡을 보냈는데 아이로 만들었다고? 이런, 저세상도 아버지들도 육아에 관심은 없는가 보네. 알았다면 오랑을 가장 손이 많이 가는 4살로 만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그가 왜 절망에 빠졌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내가 3년 안에 죄를 씻지 못하면, 그의 인생은 영원히 꼬이고 만다는 거다. 그의 운명은 내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이상하게 실감이 났다.
“그럼 너, 진짜 천상계랑 통화한 거야?”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반은 천상계 신입니다. 제가 공주님께 보여드린 전화기는 신의 물질로 창조된 것입니다. 보이지 않으셨겠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보였다. 물론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신의 물질로 제가 창조한 전화기입니다. 보이지 않죠?”
사실이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 때문이에요. 이 전화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공주님의 신성이 빵 퍼센트라는 겁니다. 단 1%만 보여도 희미하게 형상이 보이며 20%만 돼도 전부 다 보이는 전화기입니다. 자, 이건 그렇다 치고 이게 왜 문제가 되는 줄 아십니까?”
모르기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주님은 원래 신성이 40% 정도는 돼야 해요. 그래서 1년에 20%씩 채운 후 3년 뒤엔 100%가 돼야 하죠. 하지만 이 상태로는 60%만 채워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정확히 3년 뒤에 각성을 하셔야 하는데, 불가능하다는 소립니다.”
“그런데?”
“인간계에 지옥이 펼쳐질 겁니다.”
“지옥?”
“생지옥이요. 소돔과 고모라. 대격변. 인류의 멸망이죠.”
“그럼 나 때문에 지구가 망한다는 거야?”
“아니요. 사람만 망해요.”
지금까지의 대화를 유추해보면, 나는 지구에 강림한 천상계 최고 여신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그 여신은 내 몸 안 깊숙이 잠들어 있다는 것이다.
처음엔 천상계 공주라는 소리가 뭔가 특별해 보여 기분이 좋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죄를 짓고 망가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데, 공주가 뭐가 좋다고.
어쨌든 오랑이 나타나면서 벌어진 마법 같은 일들이 사실이었기에 내가 천상계 공주라는 말도 진실이겠지만,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숙명이 나를 도망치고 싶게 만든다.
빌어먹을… 공주라고 다 좋은 게 아니었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그렇다면 인류멸망도 사실이라는 거네? 미친다. 이런 황당한 일이. 내 손에 인류멸망이 달려있다니. 안 그래도 죽고 싶었는데, 더 죽고 싶게 만든다.
젠장. 지금까지 호의호식하며 살았으면 덜 억울하기라도 하지. 이건 뭐 태어나서 지금까지 개고생만 했는데 신성을 회복하고 각성을 해야 한다고? 각성을 한 다음엔 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고?
“거절한다, 오랑. 난 신성을 회복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넌 그냥 3년 있다가 돌아가. 네 몸이 아이로 고정돼도 내 알 바 아니야. 그건 네 문제지.”
“인류멸망인데도요?”
“응. 어차피 살고 싶지도 않고 빨리 죽는 게 내 목적이기도 해. 죽지 못해 사는 거니까.”
내 말이 끝나자마자 오랑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 절망, 후회와 허탈함 등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정말 실망입니다, 공주님! 어떻게 천상계 최고 존엄 옥황상제의 따님이신 분이 이렇게 무책임하고 이기적일 수 있죠!”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게 있어? 평생을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어. 그런데 왜 내가 인류를 구해야 하지?”
“그야 공주님 때문에…”
갑자기 그는 성질을 내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억울한 듯 부풀어 오른 얼굴로 하고 싶은 말을 삼킨 채 우물쭈물거렸다.
“빨리 씻고 와서 잠이나 자. 나 내일부터 알바 자리 알아봐야 돼.”
“싫습니다!”
반항하는 오랑은 빽 소리를 지르고는 구석으로 가 웅크리고 앉았다.
시위를 하는 건가? 네가 그렇게 해도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아. 나는 당장 내가 먹고사는 게 더 중요하니까. 이렇게 살다 그냥 차에 치여 죽거나, 물에 빠져 죽는 즉사를 원하지, 돈도 없는데 병에 걸려 죽고 싶진 않다.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아마도 되는 거 하나 없어 자포자기했기 때문인지도… 지금은 그렇다. 딱 죽고 싶은 심정뿐이다.
그런 내게 인류 구원? 웃기고 있네. 엿이나 먹어! 천상계 사람들아! 사람들이 내게 뭘 해줬다고 인류 구원이야? 차라리 부잣집에 태어나 호의호식하며 살아온 사람들한테나 가서 하라지. 내 알 바 아니다.
아무튼 난 오랑이 그러거나 말거나 내일을 위해 씻고 자야겠다. 이번 달 방세와 공과금은 냈지만, 다음 달이 문제니까.
씻고 나오니 오랑은 그새 잠이 들었다. 아마도 악에 받쳐 울다가 그의 아이 같은 몸이 지쳐버린 것 같다.
그나저나 진드기 하나 늘어 고달프다. 저 놈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앞길이 막막하다. 쫓아내자니 불쌍하고, 데리고 있자니 힘들고, 정말 답이 없다.
그냥 3년만 꾹 참았다가 다시 천상계로 돌려보내야지.
괜히 내려온 오랑에게 잠깐 마음이 측은해졌다. 하지만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잘 자라, 오랑. 3년 뒤엔 잘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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