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아이로 변한 오랑: 천상계의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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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온도라이, 천상의 아미

“뭐 먹을 건데? 그만 고민해. 알바 가야 되니까.”

편의점에 들른 나는 오랑이 아이스크림을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 하며 선택 장애를 겪는 모습을 보고,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스스로 깜짝 놀랐다. 안하무인처럼 구는 내 행동이 부끄러웠다. 혹시나 누가 본 사람은 없는지 편의점 안을 둘러보았는데, 다행히 아무도 없다.

혹시나 다른 곳에 숨어 있는 사람은 없는지 세심히 살폈다. 편의점 밖 야외 테이블을 청소하고 있는 알바생을 발견하고 나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하아, 다행이다. 아무도 나의 치부를 본 사람은 없다. 내가 원래 이런 여자가 아닌데… 왜 자꾸 오랑만 보면 화가 나는 걸까?

오랑은 여전히 냉장고 문을 열고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있었다. 냉장고 문을 오래 열어두는 건 민폐다. 편의점주에게 전기세 폭탄을 선사할 수 있는 행동이다.

“아우 진짜. 빨리 골라.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아, 고민이네요. 이것도 먹어보고 싶고, 저것도 먹어보고 싶은데요? 정말 딱 하나만 골라야 하나요?”

천불이 나려 한다. 편의점에 들어오기 전에 내가 괜히 “아이스크림 하나 딱 골라야 하니까 그 하나에 경제성, 맛, 그리고 영혼까지 걸어야 한다”라고 말한 게 화근이었다. 그가 이렇게 심사숙고하는 걸 기다려줄 마음이 넓고 여유로운 내가 아니다.

“다 똑같이 맛있으니까 아무거나 골라. 아까 영혼까지 걸어야 한다는 건 그냥 한 말이야. 무시해.”

“정말요? 저는 지금 영혼을 걸지 않았는데도 고르기가 무지 힘든데요. 이세계는 맛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 아쉽네요. 천상계는 손만 대도 맛을 볼 수 있어서 훨씬 쉬웠는데…”

“또 천상계 자랑질이네. 그럼 돌아가던가. 아니면 그냥 말하지 말던가.”

“아니, 그냥 그런 걸 말한 건데… 까칠하시네요.”

“됐고, 아무거나 골라. 그리고 제발 그 아저씨 목소리로 말하지 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지금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난처하게 하지 말라고, 오랑.”

“그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 목소리로 말하기에는 기력이 많이 소진되거든요. 기력 게이지가 다 닳았어요.”

“그럼 말하지 마. 이 변태야.”

오랑은 내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한 듯, 그 이후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아이스크림만 묵묵히 고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고민했다. 

야외 테이블을 다 청소하고 계산대로 돌아온 알바생이 지켜볼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정말 속에서 천불이 나는 순간이었다.

“빨리 고르라고! 지겨우니까!”

내 다그침에 오랑은 기분이 나쁘다는 듯 딸기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정말 아무렇게나 집어 든 것이었다. 그럴 거면 지금까지 왜 그렇게 고민했던 거야. 참, 한심하다. 

나는 애를 먹이는 이 천상계 남자, 아니 남자아이인 오랑의 고사리 같은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을 낚아채서 계산대로 향했다.

내 뒤에서 아이의 아장거리는 걸음소리가 들리자 또다시 속에서 천불이 났다. 계산을 마치고, 그가 따라오거나 말거나 나는 먼저 밖으로 나갔다. 

뒤통수에서 편의점 알바생의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졌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내 알 바 아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오랑이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뒤를 돌아보았다. 오랑은 편의점 문 안에서 난처해하며 서 있었다. 문을 여는 게 버거웠던 것 같다. 

보다 못한 알바생이 뛰어나와 문을 열어주었고, 나를 아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내가 더 억울하다니까요. 알바생 님아.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요.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 엄마가 아니더라도 이모가 아니더라도, 그런 말을 해봤자 나를 더 이상하게 볼 것이 뻔했다. 

나는 타인의 시선에 그리 민감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신경하지도 않다. 할 말이 있어도 꾹 참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내 속에서는 천불이 치솟는데, 내 브라자 냄새를 맡던 저 변태는 아주 귀엽게 아장아장 걸어오고 있었다. 누가 봐도 귀엽고 깜찍한 모습이지만, 나는 그의 실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내 침대에 누워 그곳을 세우고 내 브라자 냄새를 맡던 변태일 뿐이다. 

그 @같은 상황을 그 누가 알까?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해지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더 이상 오랑을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냉정하게 그를 외면하고, 아이스크림 껍질을 분풀이하듯 벗긴 후 입에 넣고 아작아작 깨물었다. 이렇게라도 하면 화가 풀릴까 싶었지만,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깨무는 것으로도 내 울화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손모가지.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손을 보니 미움이 솟구쳤다. 이 손 때문에 내가 저 변태를 데리고 있게 된 것이라는 생각에, 손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어떻게 190cm의 장신 꽃미남이 이 쓸모없는 4살짜리 아이가 됐는지, 아직도 믿기 힘들다.

내가 그날 오랑의 그곳을 보고 머리채를 잡아뜯은 후, 그는 4살배기 아이로 변했었다. 그런 뒤 그는 계약이 성사되었다며 침대 위에서 폴짝폴짝 뛰며 기뻐했다.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 어린 공주님! 정말 잘하셨어요!” 이렇게 걸걸한 아저씨 목소리로 말한 후, 짧은 다리로 침대에서 내려오려다 중심을 잃고 대자로 넘어졌다.

바닥에 엎드려버린 그는 그제야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내가 삼 일 전에 커피 마시고 던져 놓은 종이컵을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집어 들어 중요한 부위를 가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럽던지, 마치 중요한 것만 가리면 창피하지 않다는 듯한 태도가 한심하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

그는 내 눈치를 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내 앞으로 다가와 소리쳤다.

“도망가지 마세요! 해치지 않아요!”

그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채 뒤로 기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본능적으로 그렇게까지 했는지 나도 놀랐다. 아마 살기 위한 본능이었으리라. 

그래도 4살짜리 아이가 나를 어쩌겠냐는 생각에 나는 일단 뒤로 가던 걸 멈추고 그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마.”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어린 공주님.”

“듣기 싫어.”

“공주님, 정말 저는 하늘에서 보낸 사람입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아까 보셨잖습니까? 제가 어른에서 아이로 변한 것을요. 믿어 주세요.”

그래, 매직은 맞지. 인간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너 누구야? 말해.”

“저는 옥황상제의 호위무사이자, 이서민 씨의 전생, 어린 공주의 좌청룡으로 재직하던 오랑입니다.”

“옥황상제?”

“공주님의 아버님이자, 천상계 최고 존엄이십니다.”

“그러니까 내 전생이 천상계 옥황상제의 딸, 어린 공주라는 얘기야?”

“애석하게도 그렇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애석하게도’라니. 무슨 뜻인가 한참 고민을 해야 했다. 그나저나 내 망상이 현실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전생에 공주였다고 쳐. 그런데 왜 네가 나타난 거지?”

오랑은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는 세워진 무릎에 한 팔을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 기사단의 맹세라도 하는 것처럼.

“이제부터 저, 좌청룡 오랑은 공주님을 호위하며 다시 천상계로 올라가기 위한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목숨 걸고 미션을 수행할 것을 맹세합니다.”

걸걸하고 능글맞은 아저씨 목소리로 그 말을 하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가슴 속에서 다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고구마 세 개를 한 번에 삼킨 듯 답답한 기분에 가슴을 주먹으로 쳐대고 있을 때, 오랑이 짧은 다리로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가 사준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왜 네가 먹을 아이스크림을 나한테 내미는 거냐?’라는 듯이 내가 쳐다보자 오랑이 웅얼거렸다.

“까… 주세요.”

“호위? 지랄하고 자빠졌네. 아이스크림 껍데기도 못 까는 주제에?”

내 말에 오랑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훗, 아마도 아이로 변신하기 전이라면 껍데기쯤은 거뜬히 깠겠지. 하지만 지금 너는 그저 아이스크림 껍데기도 못 까는 손 많이 가는 아이다, 오랑. 도대체 어떻게 나를 호위하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며 그를 계속 노려보자, 오랑은 주눅이 든 듯 고개를 떨구었다.

참, 나도 참 이상한 여자다. 왜 그런 오랑에게 자꾸만 측은지심이 드는 걸까?

그가 벗겨달라던 아이스크림 껍질을 벗겨 그에게 주자, 오랑의 표정이 마치 화해의 제스처로 받아들인 듯 환하게 밝아졌다.

“전… 정말…”

“말하지 마. 듣기 싫어.”

단호하게 거절하자 오랑은 잠시 풀이 죽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깐. 아저씨들이 그렇게 쉽게 기죽는 걸 본 적 있나? 어차피 오랑은 몸만 아이일 뿐, 정신은 여전히 오염되고 능글맞은 아저씨였다.

역시나 그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너무 귀여워… 자꾸 마음이 흔들린다.

“이건 사기 계약이야. 나는 네 머리를 쓰다듬은 게 아니라 쥐어뜯었어. 무효야.”

“만지면 계약이 성사되는 겁니다, 공주님. 쥐어뜯은 것도 만진 거니까 계약이 성사됐고요.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저는 아이로 변하지 않았을 겁니다.”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네가 나타난 거지?”

내 말에 오랑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내가 곧바로 소리쳤다.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리고 아이 입에서 아저씨 목소리 나오는 것도 이상해. 말하지 마.”

오랑의 굵직한 아저씨 목소리가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건 정말 듣기 거북했다. 마치 엉뚱한 더빙이라도 된 것처럼. 

내 화 때문인지 오랑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아이스크림을 입에 가져가 먹고 있었다.

억울한 듯 한숨을 쉬며, 또다시 무언가를 참으려는 듯 입을 앙다문 그의 모습이… 이러면 안 되는데… 너무 귀여워… 자꾸 마음이 흔들린다.

신도 감정이 있는가 보다. 하긴 내가 너무했지. 그가 내 브래지어 냄새를 맡은 이후로 오랑을 인간 취급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이상하게도 그의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나는 잠시 흔들렸지만, 곧 냉정을 되찾았다. 

내가 한 번 속지, 두 번 속겠냐? 꽃미남에 반해 인생을 두 번이나 잃었는데, 이번엔 귀여움에 넘어가겠어? 

다시는 속지 않으리라. 사랑에도, 미모에도, 귀여움에도…

이런 것들은 정말 위험한 것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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