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가난한 카드는 학대도 쉽게 당한다

5–7 minutes

To read

도라온도라이, 천상의 아미

나의 분노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카드가 안 되면 다른 카드를 주던지, 아님 현금으로 결제하던가? 완전 민폐네.” 대놓고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지만, 저마다의 시선 속에 비난이 묻어 있었다.

‘카드가 하나밖에 없는 걸 어떡하라고? 현금도 없는 걸 어떡하라고?’

사랑에 속아 빈털터리가 된 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 마음까지 빈털터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질 수는 없다.

나는 가난해도 가난해 보이지 않으려 애써 눈을 부릅뜨고 캐셔를 노려봤다.

‘나, 만만한 사람 아니야. 내가 틀리지 않았어. 이 카드는 아침에도 썼다고.’

그러나 캐셔는 짜증 난 듯 나의 하나뿐인 나의 체크카드를 다시 단말기에 쑤셔 넣었다.

삑, 삑, 삑!

‘이런 개 같은 엑스엑스야!’ 쌍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욕을 했다간 매장을 당할 게 분명하다. SNS로 소문이라도 나면 끝이다.

현대 지성인은 참을 줄 알아야 한다. 아무리 화가 나도 인내해야 한다. 하지만 참은 분노는 얼굴을 시뻘겋게 달아오르게 했다.

분위기가 점점 싸늘해지자 보다 못한 선배 캐셔가 후다닥 달려와 문제를 해결했다. 허무할 정도로 속전속결이었다.

1분 넘게 카드를 쑤셔대던 캐셔는 초짜. 카드 뒷면의 일련번호를 입력해 5초 만에 결제를 승인시킨 새로운 캐셔는 베테랑.

‘왜 하필 초짜 캐셔가 내 계산대에 있었던 걸까? 처음부터 베테랑 캐셔였다면 페이크 봉준호를 놓치지 않았을 텐데…’

씁쓸해진 마음으로 승인이 떨어진 카드를 돌려받고 장바구니 물건을 담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마트를 나왔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블랙 티타늄 카드로 바꿔 주겠어. 그러면 단말기도 잘 인식할 수 있겠지. 내 카드도 학대당하지 않을 거야.’

불량 체크카드 오인 사고 때문에 놓친 나의 인연, 페이크 봉준호. 마트 밖으로 나온 나는 그를 한참이나 찾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아쉽다. 내 스타일이었고, 하늘이 허락한다면, 그 남자가 허락한다면 우주 최강의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현실에서 이루지 못했지만 여기서 끝낼 내가 아니다. 현실에서 못하면 망상 속에서라도 하면 된다.

머릿속으로 그 남자와 뜨겁게 불타오르고 아름다우면서 숭고한 수만 가지의 로맨스를 그려봤다.

SF 로맨스, 판타지 로맨스, 파라노말 로맨스, 로맨틱 서스펜스, 에로틱 로맨스. 심지어 막장 로맨스와 @동까지.

온갖 장르의 로맨스로 페이크 봉준호와 가상의 사랑을 나눈 나는 조금 전 쇼핑에서 상했던 기분이 어느새 상쇄되었다.

그렇게 길을 재촉하던 중 생활용품 할인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대형 마트 옆에 있는 할인 매장이라… 새로 생긴 것 같은데…

주인이 배포가 큰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알 수 없다. 대형 마트와 경쟁이 될까? 대체 그곳 주인장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 일단 들어가 보았다.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조금 전 카드 불량을 겪은 나는 정말 불량인지 확인하고 싶은 목적이 더 컸다. 분명 아침까지 잘 된 카드였기에 불량인지 아닌지 원인을 확인해야 했다.

만약 불량이라면 아침에 집 근처 마트에서 우유를 샀을 때 잘못된 것이다. 만약 불량이 아니라면, 그 대형 마트 캐셔는 정말 엑스엑스.

할인 용품점에 들어선 나는 입구 근처에 진열된 지금 당장 필요도 없는 땡땡이 스카프를 하나 골라 카운터로 갔다. ‘나중에 쓸 일이 있겠지 뭐…’

카운터로 가 나의 하나뿐인 카드를 내밀었다. 사장님은 곧바로 계산을 한 후 승인을 요청하자 카드 승인이 바로 떨어졌다.

‘이런. 씨. 카드 불량이 아니잖아! 엑스엑스.’ 

오해로 인한 모욕감과 모멸감에 치가 떨려 왔다. 카드가 불량이 아니라 단말기가 불량이었다. 그 캐셔는 왜 내 카드가 불량이라 생각했을까? 확인해 보면 되는 건데.

어쩌면 그 해프닝은 사랑하고 싶은 내 마음을 자르려는 신의 저주일지도 모른다. 페이크 봉준호의 카드는 승인이 났고, 내 카드는 승인이 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이건 운명이 아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저 스쳐가는 슬픈 인연.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래도 온갖 장르의 로맨스로 페이크 봉준호와 망상의 사랑을 나눈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상상은 이렇게 위대하다. 아니, 망상은 이렇게 위험한 거다.

집에 도착한 나는 즉시 전기밥솥에 밥을 했다. 머릿속에선 진수성찬, 산해진미가 가득한 커다란 밥상에 앉아 기미 상궁처럼 한 입씩 먹는 상상을 하면서.

하지만 현실은 밥에 젓갈뿐인 초라한 밥상. 그래도 좋다. 배는 부르니까.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정도로 배가 고팠지만 밥이 되려면 기다려야 한다. 

내 글의 조회수는 좀 늘었을까? 남는 시간에 아이조라아 사이트에 올린 내 글의 조회수를 확인해 보았다.

“씨브레… 그대로네…”

아무도 읽은 사람이 없다.

앞서 말했듯 SF 판타지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인 내 글은 인기가 없었다. 단 한 명이라도 봐주면 좋을 텐데 아무도 보는 이가 없다.

마블 유니버스엔 환장하면서 왜 바탈 유니버스는 몰라주는지…

운이 없는 건가? 아니, 실력이 없는 것이다.

마블을 이겨먹겠다고 만든 세계관을 웹소설로 풀려고 한 내가 멍청이였을지도. 아니면 치기 어린 헛꿈을 향한 무모한 도전인지도.

때려칠까? 아니면 영혼을 팔까?

레드 오션에서 살아남으려면 천재 아니면 튀거나 욕이 쏟아질 정도로 자극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천재도 아니고 튀고 싶은 강심장도 아니며, 자극적인 것은 더욱 지양하는 사람.

누가 그랬다. 운명을 바꾸려면, 타고난 기질을 바꾸어야 한다고. 그 방법 중 가장 쉬운 게 싫어하는 것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게 쉽다고? 그래서 운명을 바꾸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

지금 내 마음 속엔 수많은 갈등이 일고 있다. 감자 캐 먹고 글 공부나 하며 고고하게 살까?

아니면 막장 자극적인 소재로 미친 척 한 번 해볼까? 아니면 아예 19금을 뛰어넘어 29금을 한 번 써볼까?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성공하고 싶진 않다.

난 소설가로 성공하는 것보다 이야기를 성공시키고 싶은 게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냥, 가자. @팔!”

“맛있는 밥이 완성되었습니다. 주인님. 후후.”

갑자기 내 욕설에 화답하듯 전기밥솥에서 멘트가 흘러나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밥통 앞으로 번개같이 달려갔다. 주린 배는 나의 운동신경을 향상시켰나 보다.

밥솥 뚜껑을 열자 김이 한가득 올라와 내 얼굴을 감쌌다. 달큼하고 고소한 밥 냄새가 코속으로 들이치자, 이때까지 잠잠했던 배에서 배고프다며 꼬르륵거렸다. 참. 내 배지만 그 속을 모르겠다.

일단 밥을 푸기 위해 싱크대 문을 열고 밥공기 옆에 있는 커다란 냉면 그릇을 꺼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다만 냉면 그릇이 무조건 옳다는 마음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다. 마음에 쉽게 흔들리고, 마음에 이성을 제압당하는 그런 여자.

정말 이성적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걸 냉면 그릇을 통해 또 알아버렸지만, 그래도 나는 냉면 그릇이 옳다는 마음뿐이었다.

‘많이 먹으면 살찌는데…’라며 이성적으로 생각은 했지만 내 손은 고봉밥을 푸고 있었다. 지금 나의 생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생각과 정 반대로 움직이는 나의 신체 작용. 어쩌면 극도의 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배고픔은 이렇게 이성을 초월하고 마음을 바꾸기까지 한다.

많은 양의 밥을 위 속으로 욱여넣기 쉬운 법은 밥에 물을 말아 먹는 것이다. 씹는 시간을 줄여주고 식도로 넘어가는 걸 원활하게 해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게다가 찬물을 부어주면 뜨거워 식히려는 시간까지 아껴준다.

숟가락 가득 물 말은 밥을 퍼 그 위에 오늘 힘겹게 마트에서 사 온 젓갈 하나를 살포시 올린 다음 입에 넣었다.

이야. 꿀 맛. 천상의 맛.

첫 숟갈을 뜬 이후로 그다음부턴 어떻게 밥을 먹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허기가 밥을 먹는 건지, 아니면 의식을 놓을 만큼 맛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그 많은 고봉밥을 다 먹은 나는 숟가락이 냉면 그릇 바닥을 긁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내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쏟아졌다.

“이야. 역시 서민 3대 밥도둑! 젓갈이야!”

많은 양을 먹었다는 듯 올챙이 배처럼 불룩해진 나의 배. 갑자기 늘어난 위장 때문에 배가 아파 손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침대에 누웠다.

배불뚝이들은 다 잘 알 것이다. 방바닥에 똑바로 앉아 있는 게 얼마나 힘든지. 배가 나오면 무조건 기대거나 누워 있어야 편하다.

하아~ 배 부르다. 역시 포만감에 행복 만땅. 침대에 누우니 좋다. 다만 천장에 있는 전등의 불빛이 거슬릴 뿐이다.

불을 껐으면 좋겠는데 다시 일어나자니 귀찮아서 싫고, 옆으로 눕자니 배가 불러서 힘들고… 에라 모르겠다. 이 대신 잇몸이다. 나는 불빛을 피하려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명상에 잠겼다. 아니, 잠에 들었다.

파밧!

갑자기 방에 환한 빛으로 물들며 공간을 집어삼켰다. 빛 속에 엔젤이 들어 있을 것 같은 그런 신성하면서도 성스러운 빛. 그렇게 온 방을 물들인 환한 빛은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신성한 소리와 함께 사라졌고 대신 한 사람이 눈을 이글거리며 노려보고 있었다.

Leave a comment

BatalStone.blog is curated as a living archive.

This archive is written and maintained as a system—
essays, serials, and worldbuilding notes connected by rhythm, symbols, and structure.

I work at the intersection of storytelling, technology, and future systems—
not to brand an author, but to keep ideas retrievable over time.

Discover more from BatalStone

Subscribe now to keep reading and get access to the full archive.

Continue 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