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략 네 살 정도로 보이는 한 아이가 죽은 듯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정육점 코너 앞에 쓰러져 있는 모습에 내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 빌어먹을 인간들… 아이가 죽어 있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다니.”
나는 소리쳤다. “아저씨! 당장 119 불러 주세요!”
정육점 사장님에게 소리 지르고 아이에게 달려갔다. 순간 내 뒤통수를 대파 한 단이 내리쳤고, 뒤돌아보니 출산 후유증 때문인지 몸이 불어난 한 여성이 서 있었다.
불어난 몸을 감추려 한 듯, 카디건과 플레어스커트로 중무장한 모습이었다.
“건드리지 마세요.”
“네?”
“아이 건드리지 말라고요.”
“아니, 쓰러진 아이를 왜?”
그녀는 내 말을 듣고도 대답하지 않고, 아이 앞으로 다가가 팔짱을 끼고는 무섭게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죽은 척하지 말고 일어나. 계속 그러고 있으면 진짜 두고 갈 거야.”
“유희왕 카드 사달라고.”
“저번에 사 줬잖아.”
“또 갖고 싶다고.”
“안 돼.”
“그럼 나 계속 죽어 있을 거야.”
“이 새끼가…”
정황상 아이의 엄마인 여자는 짧고 강렬하게 한 마디만 하고는 아이를 어깨에 무심하게 짊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대파를 주워 내게 건네며 말했다.
“죄송한데, 대파 좀 제자리에 가져다 놔주세요. 아이 때문에 들고 가기가 힘들어서요.”
“아, 네… 그러죠.”
그녀는 그렇게 아이를 짊어진 채 마트를 빠져나갔다.
나는 대파 한 단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뭘 사러 왔더라? 중요한 걸 사러 왔는데…’ 일단 대파를 가져다 놓기로 했다.
반찬 코너를 지나며 눈에 들어온 것은 젓갈이었다. ‘아, 맞다. 젓갈을 사러 왔지. ‘젓갈을 사기까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오징어 젓갈과 창난젓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제 정말로 계산만 하면 되는데… 대파도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그때 내 시야에 들어온 한 남자. 지방 소도시에서 절대 볼 수 없는 비주얼이었다. 세련미 넘치는 도시 남자 같은 모습, 여기에 내려온 4년 동안 처음 보는 스타일이었다.
궁금증에 계산대 두 곳 중 하나가 비어 있음에도 나는 그 남자에게로 직진했다. 대파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살짝 불거져 나온 배와 통통한 엉덩이, 등에는 회색 배낭을 메고 있었다. 완전 내 스타일이었다.
잘생긴 것들은 다 인물값을 한다. 5년 전 사기꾼 같은 놈에게 당한 이후로 난 내 이상형을 바꿨다. 지금 보이는 저 남자가 바로 바뀌어버린 내 이상형 그 자체였다.
적당한 살집과 골격, 자유로운 봉준호 스타일의 곱슬머리. 그의 모습은 정말 자극적이었다. 면바지에 칼라가 달린 티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은 지금 당장이라도 배낭여행이라도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자유로움을 담고 있었다. 그의 뒤태는 자꾸만 나를 홀렸다.
‘제발 한 번만 돌아봐 줘. 앞모습도 봉준호 같은지 보게.’
내 마음을 읽은 듯 그가 돌아봤다. 헉. 이럴 수가…
봉준호보다 두 배는 잘생겼잖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빌어먹을 나란 여자. 남자한테 그렇게 데이고도 또 홀리다니…
순간 머릿속에서 상처받았던 또 다른 자아가 소리쳤다.
‘야, 이 서민. 그 끔찍한 첫 연애의 실패를 정녕 잊었단 말이냐? 겨우 5년 만에?’
‘너는 잠깐 들어가 있어. 그때 너는 내가 아니야. 사람은 30년마다 모든 원자가 바뀌어서 새로운 사람이 된다고 하잖아. 그러니 4년 정도면 너도 이제 내가 아니야. 꺼져. 나는 지금 연애가 고파. 로맨스를 꿈꾼다고.’
4년 동안 새로 생긴 내 자아는 과거의 상처를 잊어버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랬다.
남자를 어떻게 꼬시는지 모르는 나는 일단 그 남자의 뒤에 바짝 붙었다. 그가 나를 느낀 것인지 힐끔 돌아보고는 재빨리 계산대로 향했다. 나도 따라서 계산대에 섰다. 그의 고개가 갸웃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한 사람이 계산을 마치면 나가는 게 일반적인 절차다. 그가 이상함을 느낀 듯, 등에 맨 배낭을 벗어 계산대에 올리고는 물건을 허겁지겁 가방에 넣기 시작했다.
일단 대파 한 단이 들어갔다. 아뿔싸. 이게 운명일까? 나도 대파 한 단을 들고 있었는데… 배낭 밖으로 삐져나온 초록색 대파 부분이 왜 그렇게 멋져 보이는 걸까.
분명 너와 내가 대파를 한 단씩 들고 있는 건 우연이 아닐 터… 하늘에서 점지한 운명의 짝인 건가?
내 스타일의 남자,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장바구니에 담긴 물품을 스캔했다.
무항생제 유정란 10알이 들어 있는 달걀팩. 그럼 그렇지. 관상은 과학이고 스타일은 철학이다.
역시 스타일대로 자연주의자임을 보여주는 무항생제 유정란. 자연스럽게 생산된 달걀을 선호하는 남자라… 상당히 매력적인데?
달걀팩 옆에는 사골 곰탕 레토르트 3팩이 있었다. 그리고 가방에 이미 들어간 대파 한 단. 으아, 이 남자. 핵심을 아는 남자다. 곰탕에 총총 썬 대파가 핵심이라는 걸 알다니… 중심이 서 있는 남자다. 진국이다. 대박!
그는 내가 그의 물건에 노골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을 알아챈 듯 정신없이 곰탕과 달걀을 가방에 쑤셔 넣고는 지퍼를 닫고 가방을 맸다. 그리고 그는 말없이 캐셔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쓰레기봉투 하나 주세요!”
캐셔와 그 남자 모두 화들짝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민망함을 숨기려며 이렇게 말했다.
“급하니까 빨리 좀 계산해 주세요. 민초 라떼와 녹차 라떼부터요.”
나의 개척정신을 그에게 어필하고 싶었다. ‘너는 자유로운 남자니? 나는 개척적인 여자야.’ 그런 뉘앙스를 전달하고 싶었다.
캐셔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쓰레기봉투를 꺼내 내게 건넸다. 동시에 그의 카드 승인이 떨어졌고, 곧바로 내 물건의 계산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왜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걸까?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미리 카드를 준비하고, 페이크 봉준호가 출입문을 열기 전에 내 결제를 끝내야 한다. 내가 산 물건은 몇 개 되지 않으니 빠르게 끝날 것이다.
그리고 내 계산이 끝남과 동시에 그가 출입문을 열 것이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랜만에 깨어난 연애 세포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었다.
지금 이대로라면, 그 개 같은 남자는 완전히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실연의 아픔의 치유는 새로운 연애라는 진리. 왜 이걸 이제서야 깨우친 걸까? 조금 더 빨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 내 입꼬리는 귀에 걸렸고 광대는 승천 중이었다. 행복감에 구름 위를 나는 것 같았다.
이야호! 아뵤!
삐빅!
삐빅!
삐빅!
아우 씨!
이상한 기계음과 함께 어디선가 욕설이 터져 나왔다. 나는 캐셔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삐빅! 기계음은 내 카드가 단말기에 인식되지 않음을 알리고 있었다.
‘뭐? 말도 안 돼. 아침까지 멀쩡했는데… 이러면 곤란한데.’
나는 출구를 바라보았다. 운명의 상대가 문을 열고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내 운명의 상대는 속절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늘은 내게 새로운 연애를 허락하지 않았다.
승천했던 광대는 주저앉았고, 올라갔던 입꼬리는 다시 내려갔다.
‘세상만사가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구나.’ 역시 그래서 인생은 살 만한 거겠지. 운명의 비틀림에서 오는 재미… 어쩌면 누군가 인간의 운명을 가지고 장난치며 지켜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신인지도…
띠불.
마음속에 천불이 나자 욕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나는 이렇게 아프고 힘든데, 아름답던 캐셔는 계속해서 내 카드를 단말기에 쑤셔대며 긁어댔다.
삐빅! 삐빅! 삐빅! 삐빅! 삐빅! 삐빅! 삐빅!
기계음이 들릴 때마다 내 가슴도 찌릿했다. ‘그만 그어대라고, 이 씨!’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 얼굴이 뜨거워졌다.
불량카드라는 낙인으로 인한 창피함이 아니었다. 내 카드를 학대하는 캐셔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마음이라는 건 참 미묘하다. 처음엔 아름다워 보였던 20대의 캐셔가 왜 시간이 갈수록 못생겨 보이는 걸까? 역시 마음이 예뻐야 얼굴도 예쁜 법이구나. 이것 또한 진리다.
아무튼 아침까지 잘 되던 카드였는데, 도대체 누가 이렇게 조작이라도 하는 걸까? 정말 누군가 나를 지켜보며 엿 먹이는 존재가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계산이 밀리자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캐셔는 짜증난 얼굴로 나의 카드를 학대했다. 순간, 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렸다.
“아이, 씨… 카드 재발급받기 귀찮은데… 그만 쑤셔대요! 꽃같은 캐셔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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